Self
layout: post title: “자연 현상으로서의 나” categories: 옥이에게 tags: [“나”, “시점”, “주관성”, “무아”] —
동물은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전략을 택했다.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환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하지만 더 잘 움직이기 위해서는 환경을 알아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감각이 개발되었다. 감각은 필연적으로 ‘시점(視點)’을 만들어 낸다. 눈을 통해 사물의 위치를 알 수 있고, 귀를 통해 소리의 방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보거나 듣는 존재, 즉 나의 위치를 상정하게 된다.
여러 감각기관은 각각의 시점을 만들어 내고, 감각의 출발점이 되는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이렇게 이 시점의 중복은 ‘주관성’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시점을 가지고 있고, 시점은 주관성을 상정하게 된다. 주관성은 감각하는 자를 가정하게 된다.
만약 주관성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감각기관은 시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시점들은 서로 통합되지 못하므로 감각기관으로부터 얻은 정보는 서로 통합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정보가 된다. 똑바로 날라오는 공을 보고 공의 모양과 궤적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것이 종국에는 나에게 맞아 내가 아프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피해야 겠다는 전략을 짜내지 못하며, 결국 공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애초에 감각은 운동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주관성이 개입되지 않은 감각 기관의 정보는 다만 정보일 뿐, 운동을 촉발시키는 ‘의미’를 도출해 내지 못한다. 우리가 느끼는 ‘나’라는 관념은 바로 이러한 주관성에서 나온 것이다.
불교에서 “無我”라는 말을 한다. 내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주관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영원하고 본질적인 ‘나’를 ‘브라만’이라고 부르며 신성시 하였다. 불교의 무아는 이를 부정하기 위한 말이다. 영원하고 본질적인 실체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면 ,’나’라는 뚜렷한 실체를 찾을 수 없으며, 단지 여러가지 속성, 즉 오온(五蘊)이 모여 그렇게 인식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있어서 감각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으로부터 정보의 통합, 미래의 예측, 운동의 촉발을 위해 나라는 관념이 상정되었을 뿐이다. 누군가 토끼를 본따 하늘에 구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들어진 구름의 모양을 보고 토끼같이 생겼다고 상상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나’라는 것이 숭고하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자연이 빚어낸 하나의 ‘현상’으로서, 감각이 만들어낸 환영과 같은 관념이다.